잠깐 들러서 평가 한 번씩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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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하다? 부조리하다?

아니다. 이 상황은 그런 단순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아니, 그런 표현을 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압도적인 폭력과 잔인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조차 가소롭다는 듯이 깔아뭉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을 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도대체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도대체 왜, 왜, 왜...?

매일 아침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단란한 식사를 하던 식당은 그 어떤 온전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파괴되었다,

항상 형이 공부를 가르쳐주던 거실은 화염에 휩싸여 천천히 무너져가고 있다.

동생과 함께 뛰놀며 술래잡기를 하던 두꺼운 마룻바닥엔 깊은 공허만이 자리잡았다.

"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감각을 느끼지만, 역시 이해가 될 리 없다.

인식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 기괴함에 살며시 다리가 풀려버렸다.

집의 절반이 뜯겨나갔다.

이미 집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형태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몸도 으스스 떨린다.

문득 혼자라는 걸 깨닫고 다른 가족들에 대해 생각해냈다.

집도 이 꼴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가족의 안위다.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그 괴로운 광경이 끝없이 이어질 뿐.

갑작스레 현기증이 난다. 속이 메스껍다. 숨이 가빠진다.

가슴을 두드리며 헛구역질을 하지만 끈적끈적한 침덩어리들만이 느껴졌다.

끼익, 끼익...

낡고 헌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나 뿐일리가 없다.

집은 이 꼴이 되었어도 가족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엄마, 아빠, 형, 동생, 시종들. 모두 무사할 것이다.

"하아...하아. 무사했구..."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가 붉은 물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피할 틈도 없이 물체의 중량을 감당한 채 쓰러졌다.

마룻바닥과 머리가 그대로 충돌하여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머리로 피가 쏠리는 느낌과 함께 머리가 따뜻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다.

"크윽..."

비릿한 악취가 났다.

녹슨 철 냄새와도 흡사한... 피 냄새다.

"아...아으..."

하지만 그 냄새의 주인은 나 뿐만이 아니다.

나를 깔아뭉갠 붉은 물체... 그 정체는 바로 피로 물든 시체였다.

"으아아아아아!"

미친듯이 고함을 지르며 물체를 내팽개쳤다.

물체로부터 묻은 진득진득한 액체는 나의 파자마마저 붉게 물들였다.

손가락 끝부터 팔뚝까지, 양팔은 모두 피범벅이었으며 입안에서도 피냄새가 진동했다.

"윽... 우윽... 억..."

수차례 헛구역질을 반복하자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물질이 올라왔다.

피냄새와 구토의 흔적이 뒤섞여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푸힛, 푸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멍청한 자식, 제 어미도 몰라보고 내던져 버리는구나!"

남자의 목소리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절대로 환청이 아니다.

그저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아주 낙천적인 성격이거나 혹은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의 웃음소리다.

두통이 지속되어 사물이 두 개로 갈라져 보일 지경이지만 전력으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썹엔 반절로 갈라버리는 굵고 진한 상처가 있어 어찌 보면 사나워 보일 수도 있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하여 눈동자가 미세하게 보이고,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려 마치 친한 옆집 형과 같은 친숙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런 첫인상과는 달리 그 작은 두 눈 사이로 비추어지는 날카로운 눈빛은 내 모든 행동과 생각을 감시하겠다는 듯이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 표정의 너를 보는 건 얼마 만일까...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군."

무슨 소리야.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입에 고인 침과 함께 속으로 밀어넣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망연자실히 앉아있자, 남자가 묵직한 발걸음을 이끌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왜 그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천천히, 천천히.

본능은 도망치라고 외쳤으나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미 풀려버린 다리는 진작에 내 통제를 벗어났다.

남자는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더니 결국 내 눈앞에 도달했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10살의 몸에 불과하기에 그가 아무리 눈높이를 낮추어도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정말 어리군. 너무 약해빠진 몸이야. 너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 뺨을 쓰다듬는 그 손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차가웠다.

오한이 온몸을 쓸고 지나간다.

역겹다. 다시 구역질을 할것만 같았다.

"넌 항상 잘났었지. 언제나 나를 앞서갔어. 학문이며 검술이며... 심지어 재능의 영역인 마법조차도."

남자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콧대를 쓸고, 입술을 매만지고, 턱을 스쳤다.

그의 손이 지나간 곳엔 냉기가 서렸고 내 감각을 앗아갔다.

손길은 멈추지 않고 내려가 목 언저리에서 멈췄다.

"세상은 널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항상 시기적절히 나타나는 기연과 네가 하는 일이라면 믿고 따르는 멍청한 동료들."

그 손이 천천히 목을 감쌌다.

온몸이 몸서리치며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젠장. 나도 그랬어. 나도 그랬다고. 너는 항상 옳다고, 너는 훌륭하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있었다고. 그런 널 따르며 결국엔 집안까지 배신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

남자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을 쥐며 내 목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숨이 멎었다. 시야가 온갖 얼룩으로 점철돼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켁켁거리며 젖먹던 힘까지 짜내 그에게 발길질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그저 깊은 증오가 깃든 눈으로 날 노려보며 천천히 일어섰다.

“ 하나만, 단 하나만 양보해 주었더라면 말이지 ”

딛을 곳을 잃은 두 다리는 허공에서 날뛰었다.

나는 남자의 팔목을 움켜쥐며 그 손을 풀으려 전력을 쏟았지만 역시나 요지부동이었다.

죽어갔다.

말 그대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에게 내 생명을 맞긴 채 공중에서 죽어갔다.

"내가 원했던 단 한가지... 아리엘, 그녀였다. 네가 당연하다는 듯 마음을 뺏어갔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네가 외면한 그녀였다고, 이 개자식아!"

눈앞이 캄캄해졌다.

끝이다. 이건 완벽한 끝이다.

힘이 더욱 거세지고 정말로 죽는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고막을 울리는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엄청난 폭발음이 울렸다.

나를 구속하던 힘은 사라지자 나는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떨어졌다.

갑작스레 전신을 덮쳐오는 피로감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Blind---

"아...으..."

목을 태우는 갈증. 온몸이 찢어질 듯한 근육통. 머릿속을 헤집는 두통.

이 모든 불쾌한 감각에 단말마의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이젠 완전히 미쳐버린 걸까.

모든 것이 사라진 잿빛 세상만이 보인다.

일말의 불씨조차 보이지 않은 채 회색으로 칠해진 세상이다.

잿가루와 먼지가 무리를 지어 공중에 떠다닌다.

그 어떤 문명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내가 미쳐버린 건지 세상이 미친 채로 돌아가는 건지.

"...칼."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엔 암녹색 로브를 입은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폐허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로브엔 늑대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늑대는 얌전히 앉아 있으나 목을 살짝 내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 강렬한 눈빛엔 희미하지만 확실한 투지가 담겨있다.

익숙한 문양이다. 익숙한 것 뿐만이 아니다. 저건 우리 가문의 문양이다.

렉스울프 가(家)의 영지인 로스텐드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늑대종 렉스울프를 본뜬 것이다.

그 순간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라진 것이다. 모든 것이.

넓은 토지 위에 굳건히 서 있던 저택. 렉스울프 가문의 대저택이 지금은 한낱 잿더미가 되어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다.

"엄...마... 아버지..."

갈라진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내뱉어본다.

건조한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극심한 고통으로 느껴진다.

"어디야...? 다들 어디 간거야...?"

번뜩 기억의 단편이 떠올랐다.

정신을 잃기 전 만났던 남자가 나에게 던진 물체.

그때는 공포에 질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는 똑바로 보았던 것이다. 두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피로 물든 누군가의 시체였다. 누군가, 나의 가장 소중한 누군가의 시체.

그 사실을 깨닫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아플 뿐이었다.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강렬한 슬픔이 그 무엇보다도 아프게 느껴졌다.

신기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숨이 턱 막혀버릴 정도로 가슴 아프고, 또 슬펐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반발심에 부렸던 덧없는 고집일까.

눈물을 흘려버리면 현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모든 걸 잃어버린 현실을 인정하게 되기에.

그런 나를 바라보며 로브를 쓴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무릎을 꿇었다. 로브에 가려져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벗어나 로브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나는 보았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또다시... 널..."

---Cut---

"하아, 하아, 하아... 젠장."

윗옷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내팽개쳤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수건으로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닦아냈다. 상반신은 물론이고 하반신까지 땀에 젖어 불쾌한 느낌이 났다.

7년, 무려 7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매일같이 같은 꿈만 꾼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루도 빼먹는 일 없이 항상 찾아온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할련만, 꿈 속의 내용은 항상 신선한 불쾌감을 동반한다.

마치 똑같은 경험을 매번 실제로 반복하는 것만 같다.

[아아 — 승객 여러분께 안내방송 드립니다. 지금 이용하고 계신 사르탈렝 행 마력열차(魔力列車)는 앞으로 10분 후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가지고 계신 짐을 미리 정리하시고 자리에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객실 내에 선명하게 울려퍼지는 중후한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햇살을 가린 커튼을 걷어내자 세찬 빛줄기가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윽..."

천천히 눈을 뜨자 불규칙적이고 빽빽히 나열돼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수많은 나무들 사이사이에서 각자 제 할일을 하고 있는 산다람쥐, 청솔모 같은 동물들도 스쳐지나가며 보았다.

어제 저녁에 보인 황량한 사막지대와는 색다른 느낌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타지에 도달했단 것을 체감했다.

오늘부터는 완전히 색다른 장소와 환경,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해야 한다.

"일단 씻어야겠다..."

나는 아직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비틀비틀 욕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객실 자체가 1인용이라 그런지 크기부터가 원체 작아, 몇걸음 가지 않고도 욕실 문앞에 도달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다시 한 번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열차는 숲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거주구역에 들어섰다.

철도 밖으로 분주한 마을의 풍경이 보였다.

빨래를 너는 아낙네,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쏘다니는 아이들, 직장에 나갈 준비를 하는 가장들.

그런 거주구를 재빠른 속도로 지나 드디어 내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뻗어있는 원기둥 모양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제각기 독특하고 신선한 모양을 한 건물들이 넓은 대지에 퍼져있다.

사람들의 복장도 획일화되기 시작했다.

흰색 상의의 앞부분에는 일직선으로 뻗은 두 굵은 선이 나열돼있고 어깨에는 황금색 겉테두리와 남색이 어우러진 케이프를 걸쳤다.

또한 남자는 다리에 살짝 달라붙는 검정색 바지, 여자는 짧은 트임 스커트를 입고 있다.

"사르탈렝..."

약 800년 전 지식의 대가이자 마법에 정통했다던 ‘ 현자 ’ 고르뮬렛이 설립한 연구 목적의 첨탑을 중심으로 번창한 도시의 이름이다.

처음에는 5층 정도의 작은 탑에서 시작하여 점점 증축에 증축을 계속하더니 현재는 100층에 이르렀다.

그리고 탑 주변에 점점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자들이 점점 모여들어 상업지역을 형성하고, 거주지역을 형성하더니 어느 순간 대도시로 탈바꿈하였다.

그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수많은 국가에서 귀족이나 왕가의 자제들의 유학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젠 평민들까지도 입학이 가능한 학교의 형태가 되었다.

사르탈렝은 도시이자 학교이며 지식의 상징이다.

누구든지 재능이 있거나 학문을 갈망하는 자를 환영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그에 걸맞는 예법을 익혀야 한다는 삼촌의 말에 따라 억지로 이곳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솔직한 내 심정?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이름뿐인 귀족의 지위조차 내팽개쳐 버리고 변방의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며 생을 마감하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가 자주 해주시던 말도 떠오른다.

삼촌의 명령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게 만든 아버지의 한 마디.

지식은 힘이라고. 힘을 키워야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다고.

"바보같은 소리... 젠장!"

무심코 문고리를 거세게 움켜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에는 문고리 모양의 자국이 벌겋게 남아있다.

그래, 바보 같은 소리다.

그렇게 지식이 강인한 것이라면 어째서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 것인가.

학자로서 ‘ 현시대 최고의 지성 ’ 이라는 평가를 받던 아버지는 대체 왜.

"하아... 모르겠다, 진짜."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되돌아가지도 어떻게 하지도 못한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조용히 살아가는 수밖에.

그런 결심을 한 나는 창밖에서 눈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아아- 승객 여러분께 안내방송 드립니다. 지금 이용하고 계신 사르탈렝 행 마력열차는 앞으로 5분 후 목적지에...]

1517년 2월 26일 토요일.

17살의 난 지식의 도시, 사르탈렝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