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시간에만 일하라’…반갑지만 더 세진 노동 강도

지금은 시스템 접속 시간이 아닙니다’ ‘9 to 5 시행 중, 앞으로 26분01초 남았습니다’.

ㄱ사는 다음달부터 일과 시간에만 회사 전산망을 개방하기로 했다. 출근시간 이전에 회사 시스템에 접속하면 접속이 아예 안된다. 또 퇴근시간이 되면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꺼진다. 야근은 사전에 신청해 부장 등 상급자에게 승인받은 경우에만 할 수 있다. 이 회사의 슬로건은 요즘 ‘근무시간에만 일한다’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달 시행되는 주당 최대 52시간 근무제를 앞두고 기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상당수 대기업들은 근로기준법이 개정된 올 초부터 시범 운영을 통해 ‘업무 바이오리듬’을 새로운 체제에 맞추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시간 절약을 위해 회의도 줄인다. ㄴ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밤을 새워서라도 함께 얘기해보자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개별적으로 생각해본 뒤 만나서 효율적으로 얘기하자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내부 회의에서는 파워포인트(PPT) 금지를 선언한 회사도 있다. 한번만 읽어보면 되는 자료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공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이다.

직장인들은 “퇴근시간 후에는 정말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며 대체로 반기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업무량은 그대로 놔둔 채 근무시간만 줄여 노동 강도가 세졌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근무시간에만 일하라’…‘칼퇴근’ 반갑지만 더 세진 노동 강도

달라지는 직장 문화

“너무 평범한 원칙이라 특별하지 않은 것 같지만 퇴근시간이 되면 무조건 회사를 나선다는 것이 가장 큰 인식의 변화인 것 같아요. 퇴근시간 이후에는 실제로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는 거죠. 예전에는 퇴근시간이 되어도 일이 있으면 못 끊고 야근하고 그랬던 것에서 이제는 무조건 퇴근시간에 나간다는 인식이 있으니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업무시간에 일을 마치려고 하게 됩니다.” 사무직을 대상으로 지난 3월부터 주 40시간 근무제를 시범 운영 중인 LG전자 관계자가 전하는 달라진 회사 분위기다.

■ PC 꺼지고, 무조건 퇴근

회의 축소·퇴근시간 PC 차단

직장문화 변화 속 업무량 그대로

대기업들, 직원에 자율성 부여

출퇴근·근무시간 등 ‘알아서’

주 35시간이나 주 40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출근시간 이전에 회사 시스템에 접속할 경우 아예 접속 자체가 안된다거나, 퇴근시간이 되면 PC가 자동으로 꺼지는 ‘PC오프제’ ‘PC 셧다운제’를 도입했다. 사전에 신청해 상급자에게 승인받은 경우에만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선택근로제, 재량근로제, ‘인 타임 패키지(In Time Package)’ 등 근무시간 관리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는 조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근무시간만 채우면 출퇴근 시간이나 업무 집중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해 개인적 삶의 만족도와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삼성전자는 오는 7월부터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근무시간 관리에 직원 자율권을 부여하는 ‘재량근로제’를 동시에 도입한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주 40시간이 아닌 월평균 주 40시간 내에서 출퇴근 시간과 근로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제도다. 재량근로제는 업무 수행 수단이나 근로시간 관리와 관련해 직원에게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법적으로 신제품이나 신기술 연구·개발(R&D) 업무에 한해 적용이 가능하다. 삼성전자는 우선 개발과 사무직 직원들을 대상으로 적용하며, 제조 부문의 경우 에어컨 성수기 등에 대비하기 위해 ‘3개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한화케미칼은 퇴근시간을 넘겨 야근을 하면 그 시간만큼 단축 근무하고, 출퇴근 시간도 개인 상황에 맞게 자율 선택하는 ‘인타임 패키지’를 시행한다. 2주 8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야근을 하면 해당 시간만큼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다. 야근뿐 아니라 주말부부, 육아 부담, 장거리 연애 등 개인 상황에 맞게 근무시간을 활용하게 된다. 주말부부인 직원은 금요일 오전에 4시간만 근무하고 조기 퇴근을 하는 대신 2주 내에 본인이 원하는 날 초과 근무를 하면 된다. 오전 7시부터 10시 사이 30분 간격으로 출근시간을 자율 선택하는 ‘시차 출퇴근제’도 도입한다.

■ 끝장 토론·딴짓 금지

기업들은 근무시간을 줄이는 대신 업무의 집중도를 높여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는 데에도 집중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회의 문화 개선이다. 아예 제도적으로 회의시간을 줄이는 곳도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회의 타이머’ 제도를 도입했다. 회의시간을 최대 1~2시간 정도로 미리 정해 계획된 시간 안에서 회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마련된 캠페인이다. 내부 회의자료는 간단한 메모로 대체해 PPT 작성도 최소화하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관계자는 “불필요하게 회의를 준비하는 데 보내는 시간을 없애는 것”이라며 “내부에서 공유하는 자료를 단지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집중근무시간을 설정해 특정 시간대에는 다 같이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한다거나 흡연실을 정해진 시간만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 시간에는 팀 회의도 최소화하고 반드시 당일에 소화해야 하는 업무를 달성하도록 한다. CJ는 계열사 사업부별로 집중근무시간에는 회의·흡연·티타임을 자제하는 ‘3무 운동’을 벌이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한화토탈은 영업활동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 기기에 설치된 애플리케이션으로 처리할 수 있는 ‘스마트 세일즈 시스템’ 운영을 시작했다.

영업 관련 업무처리 기능을 한곳으로 통합해 복수의 시스템에 접속할 필요 없이 한번에 업무처리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거래처를 방문할 때는 현장사진 촬영·업로드 등을 통해 방문 보고가 가능하고, e메일 전송이나 결재 상신 기능도 이용할 수 있다. 회사는 이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국내 영업 담당 직원들의 업무시간이 월 누적 1400시간가량 절약될 것으로 예상했다.

■ 일은 그대로인데 시간만 단축

승진 앞두고 고위 임원 눈치에

관리자들 ‘자의 반 타의 반’ 야근

일부선 근로시간 허위 입력도

적정 업무량 분석·조정 필수

그러나 주당 최대 52시간 근무제가 기업에 완전히 뿌리내리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장시간 근로가 조직에 대한 충성도라고 생각하는 의사 결정권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무실에는 입구에 직원 이름과 출퇴근 시간이 나란히 기재돼 있다.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원하는 시간대를 선택해 출근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오전 7시~오후 4시, 오전 10시~오후 7시 근무다. 평사원이나 대리 등 낮은 직급의 직원들은 “법대로 40시간만 일한다”며 퇴근시간에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선다. 그러나 관리자인 팀장이나 부장은 속내가 다르다. 관리자급인 김모씨는 “막내급 직원들이야 법정 근로시간에 충분히 맞출 수 있지만 관리자 역할을 하는 위치로 올라갈수록 주 40시간은 물론 52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아이와 함께 저녁을 보내고 싶지만 승진을 앞둔 시점에서는 여전히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씨는 회사 고위 임원으로부터 “앞으로 상무가 되려거든 알아서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근무시간은 줄이면서 업무량을 조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8시간 동안 하던 일을 7시간에 해야 한다면 그만큼 노동 강도가 세진 셈이다. 대관이나 영업 등 주로 외부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개인용 모바일 기기를 보급해 사내 업무를 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퇴근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오는 ‘카톡 지시’가 근절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직장인 240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75.6%는 ‘퇴근 뒤에도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시간은 줄었는데 할 일은 그대로이다 보니 근로시간과 비근로시간 입력이 허위로 이뤄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실제로는 10시간 일을 했지만 하루 8시간에 맞추기 위해 2시간을 비근로시간(휴식시간)으로 입력하는 식이다.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장시간 노동이 생산성을 담보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을 기업에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중장기적으로 노동자 한 명이 해야 할 업무량이나 직무 분석이 병행돼 업종별로 적정 노동시간과 적정 업무량에 대한 분석이 세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