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를 20번 만날 수 있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1943년생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육체의 파괴다.
나는 여기서 '신체
身體
'라고 하지 않았다. '육체
肉體'
와 차별화된다는 맥락에서 신체를 배제했다.
실질적으로 두 단어는 모두 사람의 물질적인 몸을 지칭한다고 사전에 풀이되어 있음에도,
왠지 육체 쪽이 어딘가 고기덩어리의 냄새를 풍기고, 신체는 관념의 그릇처럼 여겨진다.
모든 공
포물의 매혹은 신체 절단이라는 금기 위반에서 근거하는데,
목덜미의 작은 핏방울로 상징되는 흡혈귀, 삶/죽음의 이분법을 교란시키는 좀비물,
탈신체화를 통해 기존의 육체를 폐기시키는 프랑켄슈타인-사이보그 류 등은 이 부류의 대표격이다.
죠스 류의 괴수물이 은밀하게 침입해오는 지점도 결국은 그들이 어떻게 육체를 도륙하는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육체의 동일성이야말로 현대 이전에 거의 의심될 수 없는 완전한 존재론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이후 후인들에 의해 어떻게 변환되었는가를 논하는 것보다 주목할 것은
과연' 나'라는 주체성이 아닌 물질로서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있다.
현대 이전에 그들은 나
=정신이
가지는 절대성 안에서 육체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신의 존재증명 중 가장 무디다고 할, 존재론적 증명 즉
존재라는 속성이야말로 완전
함의 기초라는 순환논리에서
존재가
물질이 아니라 정신임을 의심할 바 없다면, 신은 결코 육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히 신이 육체를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천박한 것이다. 환영은 결코 육체가 아닌 정신의 위대한 의상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1966년부터 현재까지 육체의 동일성에 대한 의문을 줄곧 제기한 작가다.
<폭력의 역사> 이후 최근작 <코스모폴리스>까지의 여정을 일종의 이탈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육체에 대한 기존의 변형 어법을 탈피한 또다른 어법이라고 해석하는 면이 타당하다.
이같은 점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호러작가이고, 그는 상업 영화관에서 적잖이 환영받았다.
국내에서 그를 접하는 거의 모든 영화광들의 첫 경로는 비디오로 출시된 <열외인간
Rabid>
1977년작일 것이다.
그 외에 <스캐너스>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은 예외없이 비디오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친숙한 풍경이었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근심하는 이들에게, 육체의 변형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즐겁게 향유하면서
20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이 화단에서 이룩한 것들을 스크린 위로 옮겨오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같은 그의 영화들이 영화제 등에서 환영받은 것은 육체의 두려운
귀환
이라는 낡은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관되겠지만,
이제 누구나 자기 동일성 안에서 숨쉴 수 있는 시대가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기획의도가 받아들여졌음이라고 봐도 좋겠다.
굳이 <비디오드롬>이나 <엑시스
텐즈> 등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현대는 기계-인간 자체가 되버린지 오래다.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에 머리를
처박고 가는 이들을 보라, 그들은 이미 중독이 아니라, 기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 하다.
이 방면의 전설적 선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토드 브라우닝의 1932년작 <프릭스>일 것이며
이후 무수한 B급 공포물(1958년작 커트 뉴먼의 <플라이>를 당연히 포함해서)은 동류의 계보를 이어갔다.
동시대 할리우드에서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져 헤드>, <엘리펀트 맨>, <사구> 등과
폴 버호벤의 <로보캅>, <토탈 리콜>, <스타쉽 트루퍼즈> 등의 작품 역시도 유사한 괄호 안에 넣을 수 있겠다.
여기에 일본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이나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괴인들 역시 친근한 이웃이자 선배가 된다.
이들은 모두 정신적 동일성 혹은 주체성이라는 기존의 인간관을 버리고
육체의 현존을 무너뜨리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보려하고, 20 세기 자본주의 기계 문명에 소환술을 걸었다.
이같은 주제에 흔히 동원되는 비선형적 서사와 몽환적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작품은 전술했듯 상업 영화관에서 환영받을 정도의 일직선적인 서사가 주류를 이룬다.
여담 하나
, 특이
하게도 그의 초기작 중 <패스트 컴퍼니>라는 작품도 슬쩍 초기 비디오시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이같은 육체의 동일성에 대한 침범이 아닌 거의 평범한 자동차 경주에 대한 장르물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아마추어 카레이서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로소
엉뚱한 연출의도
가 되는 영화다.
나 역시 <열외인간>으로 시작해 비디오와 극장 개봉을 통해 그의 작품 중 10편 정도를 이미 접했지만,
<코스모폴리스>의 개봉에 맞춰, 오래전 본 작품들 중 몇몇을 다시 읽고, 빠뜨린 영화들을 여정에 동봉한다.
하나의 주제에 몰두한 감독이기에 각 작품들에 대해 길게 늘어놓을 감상이 모자라니, 짧게 쓴다.
7월의 시작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에게로 간다.
1. 코스모폴리스 Cosmopolis (2012) : 돈의 눈물, 길없는 로드무비
먼저 우스개 음모론 하나.
잭슨 폴록과 바넷 뉴먼, 두 추상표현주의 화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소문은 아니겠지만,
유럽 화단의 명성을 뉴욕으로 옮겨오기 위한 문화정치적 작업을 비밀리에 미정부가 수행했다는 루머가 있었다.
뜨거운 표현적 추상 혹은 드리핑 페인팅으로 기억되는 잭슨 폴록에 대한 대표적인 음해를
굳이 차가운 색상의 추상인 바넷 뉴먼 혹은 그의 지퍼 작업 일반에 부가하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이들 두 추상 표현주의 화가의 대표적인 기법이 드러난 그림으로 오프닝과 엔딩을 담은 본편이
두 화가 사이의 10년 혹은 1960년대까지의 20여년의 황금기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뉴욕에는 갤러리 뿐 아니라 증권거래소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같지만 다른 이름이겠지만.
본편에 대한 가장 평이한 이해는 자본주의에 대한 고독한 평문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굳이 부인할 이유가 없거니와, 그같은 직관을 발휘한 분들은 폄하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관람하기 전날 명동에서 'just married'라는 글귀를 가진 하얀색 리무진을 봤고
다음날 극장에서 동일한 크기의 긴 하얀색 리무진에 탄 주인공을 만나는 우연을 경험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데이빗 크로넨버그에게 본편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3번째 자동차 영화다.
첫번째는 1979년작 <패스트 컴퍼니>, 두번째는 1996년작 <크래쉬>.
두 영화 모두 기억이 희미하지만, 자동차가 인간 신체의 연장으로서 작동한다는 점은 본편과 동일하다.
오프닝은 위 좌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하얀색 리무진의 가로선들은 분명 엔딩의 바넷 뉴먼의 지퍼 기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본편을 추상의 복잡계와 숭고의 신비함으로 규정짓는 것에는 반 정도만 동의하고 싶다.
본편의 원제목을 혼란의 도시라고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분명, 잭슨 폴록의 드리핑 페인팅 기법에서 본편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자본의 성패를 지명하는 듯 하고,
바넷 뉴먼의 숭고함처럼 주인공 에릭 패커에게 종교적 순교 의식을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반에 흐르는 공기는 결국 자동차 = 자본 = 인간의 가련한 결합의 초상화에 가깝다.
자동차 영화임에도 자동차 밖의 길을 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함이 타당하다면,
즉 이미 자동차 밖이라는 공간은 주체가 개입하거나 재기입할 이유도 의미도 없는 부존재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인 유아론일 수도 있는 자동차 내부의 자본은 그 외부에서 자신의 존재를 경험할 수 없다.
주인공 에릭 패커가 자신의 부인과 만나는 몇몇 장면에서 그들의 얼굴이 카메라로 왜곡될 때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자동차 내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던진다.
자동차 영화라는 로드 무비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는가에 있겠지만,
본편의 경우에는 전문 조력가들의 무수한 언어들이 분에 넘치게 번져나옴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에릭 패커가 어디서 자동차를 이탈하는지에 좀 더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동차 안으로 들어서는 방문객들이 제각각 어떤 입장을 밝히든지간에
결국 그들은 자본의 조력자이자 그들의 하수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예외라면 음악 관계자로 등장하는 비대한 몸집의 흑인 남성 정도겠지만,
에릭 패커가 춤추는 클럽을 방문한 이후부터 실상 영화가 후반부의 예고된 관습적인 전환으로 옮겨지는 꼭지점에
그가 등장하였고 난데없이 하나의 숭고한 죽음을 전함으로서 주인공의 운명을 대리한다는 점에서 다소 진부하다.
첫 이탈은 택시로 들어가면서 이루어진다. 하얀색 리무진에서 피자 광고를 실은 노란 택시로의 이동.
물론, 거기에는 자신의 현 부인이 탑승하고 있다.
질문과 대답의 궁색함. 왜 그녀는 고급 승용차와 기사가 아닌 택시를 타고 있는가.
여기에는 당신이 급히 끌어당겨야할 구차한 드리핑 페인팅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할리우드의 무수한 최고층 드라마를 벗어나는 이탈됨, 예상할 수 없는 복잡함, 그로부터의 예정된 추락.
즉, 그가 처음으로 리무진을 벗어나서 가는 곳은 서민들이 타는 택시라는 공간이라는 점에 주목하자는 말이다.
그들 부부는 어디로 갔는가? 언제든 예약없이 갈 수 있을만한 고급 레스토랑이 여기에는 없다.
당신은 아마도 그 곳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동네 분식점 정도의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한다. 택시에 이은 분식점의 동어 반복.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 곳에서 그들의 얼굴은 후경의 서민들과 빗대어 왜곡된 홀로 된 존재다.
세번째 공간으로 가기 전에 주인공 에릭 패커(혹은 관객은)은 길거리 현금인출기 앞의 폴 지아마티를 우연히 본다.
결말부에서 에릭 패커는 그를 어디서 봤는지 정확히 기억하면서 대사로 언급한다.
다시 한번의 의도된 드리핑 페인팅. 이건 다소 구식이기는 하다.
스쳐감이 끝냄으로 되돌아오는 설정은 이미 늙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종내 그것을 고집한다.
물론, 거기에는 좀 더 다른 덧칠이 있기는 하다.
여튼 세번째 공간으로서의 서점은 또다른 공간인 연극 공연장 앞 노상과 쌍이 된다.
자본의 장식품으로서의 화폭과 마찬가지로 서적과 연극은 관람자의 신분에 따라 본질을 잃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들 부부를 서점 내부와 연극 극장 앞에서 만나도록 배치한다.
일종의 고집이자 자존심.
여기에 이슬람 랩퍼의 장례식 행렬과 난데없는 주인공 에릭 패커의 흐느낌을 더하면 영화는 다소 신파가 된다.
여전히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예술의 존재론이 아집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몇몇 성관계 시퀀스에서의 주인공 에릭 페커의 위치, 즉 성적 체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나칠 수 있지만,
굳이 차 내에서 전립선 검사를 받는 장면을 길게 늘어놓으면서 여성 경제이론가의 성적 흥분을 지켜보는 것은 수상하다.
물론, 방점은 여성 흑인 경호원이 테이저건으로 에릭 패커의 가슴 부위를 붉게 겨누는 광선에 있을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신혼의 백인 여성 부인을 제외하고,
나이든 큐레이터나 흑인 여성 경호원 등과 관계를 가질 때 미안하지만 나는 그의 성적 체위가 다시한번 의심스럽다.
위안화 격상으로 인해 자신의 파탄이 예고된 이후 영화는 그야말로 급강하로 추락한다.
클럽 댄스를 내려다보는 서글픔, 이슬람 랩퍼의 장례식, 파이 공격 세례, 경호원 살해 등의 일련의 리듬은
애석하게도 누군가에게는 경괘한 경사로의 쾌감이겠지만, 나로서는 추락의 미학으로서 그다지 공감이 깊지 않다.
허름한 이발관에서 준비된듯한 권총을 받고 온통 낙서로 뒤덮힌 하얀색 리무진에서 드디어 하차하는 지점부터
영화는 나머지 20분이라는 긴 시간을 차에서 내린(즉 이제 더 이상 자동차 영화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주인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너무나도 나약하게 고민하는 퇴색이 스물스물 기어오른다.
자본에 대한 기독교적 안식.
폴 지아마티의 권총에 밝은 조명등이 장착된 이유와 에릭 패커가 손바닥을 관통하는 자해를 하는지는 상식이 된다.
문제는 이같은 기독교적 종결이 결국 살해에 이르지 않고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버릴 때
이제까지 영화가 지속해온 자본의 예상할 수 없었던 몰락의 로드 무비가 과연 그 해답을 제대로 획득했는가에 있다.
자동차 속에 장착된 최신형 주가관련 스크린 대신, 폴 지아마티의 집에 널부러진 구형 모니터들이
이제 최후의 반란을 성공시키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일말의 허탈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실제로 뉴욕 증권맨들은 결코 몰락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투기 자본으로 활활 부활의 춤을 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동차와 자본을 동일시하고,
그 자동차 안에서 기어이 사람을 하차시킨 이후에 정해진 몰락과 종교 예배의 시간으로 몰아가기를 고집한다.
자, 이것은 실물 경제적으로 타당한 지를 건너, 미학적으로 새로운 로드 무비의 탄생인가.
만일 당신이 돈의 눈물을 보았고, 길 없는 로드 무비에 동행할 수 있었다면
추상 표현주의라는 미술사조, 유럽에서 미국으로 일약 미술사의 흐름을 옮겨온 문화 정치적인 힘의 역량이
지금 여기 데비잇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감싸안아 본편을 복잡계의 숭고함으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코스모폴리스>는 견고한 자동차 안의 고립이 결국 자동차 밖으로 하차할 수 밖에 없는 '들쥐'같은 사연이며,
그 길에 가해지는 점층되는 하중으로 인해 결국 기독교적 순교의식을 택하는 부질없는 희망서사극이다.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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