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이제 구로사와 아키라의 전작에 대한 간략한 감상문도 중반을 넘어선다.
그간의 글들이 작품의 연대기 순으로 읽어나갔다면 이번에는 느닷없이 앞으로 돌아간다.
누구나 신인인 시절이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30대 중반 또한 제작사의 흥행 압력과 전시 국가적 상황이라는 압력이 작용했다.
그는 국책 홍보영화라고 해도 좋을 작품과 일본 국민들의 자존심을 세워줄 작품을 스크린 위로 올렸다.
스스로는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식민지 압제의 후손 입장으로 보건데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어떤 식으로든 두 작품을 연출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타협의 소산은 언제나 굴욕이다.
후일 리차드 기어의 영화 속 사과까지 삽입시켰던 "8월의 광시곡"을 떠올린다면 압박의 소산으로 읽혀지지만 않는다.
전술했듯이,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전작에서 언제나 천황의 지위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할만큼
국가주의적 입장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 드라마 등을 어떤 인간인지가 불분명한 휴머니즘으로 오고갔으니
초창기 그의 작품이 단지 국가적 상황과 제작사의 압력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편협할 수 있겠다.
그의 전작품 중
2번째와 3번째, 그리고 19번째 작품을 시간을 거슬러 만나본다.
16. 가장 아름답게 一番美しく(1944) : 반장은 남자들과 일할 수 있다 혹은 일해야한다.
바야흐로 2차 대전에서 일본군은 점점 더 물량공세에 밀리게된다.
동남아 전장에서 일본군이 괜히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니고,
일본군 장교들이 사무라이 후예랍시고 칼 휘두르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조선땅의 인간, 물건 등을 모두 동을 내서 물자를 조달했으니 일본 국내는 오죽했을까?
유럽의 동맹국들은 점점 더 전의 상실로 패색이 짙어지는 시점이었을테니.
식민지 조선의 문인들과 영화인들 모두 내선일체의 기치 아래
지원병과 정신대라는 황당한 죽음의 수출을 부끄럽지도 않게 수행하며
군수용품에 다를 바 없는 시와 영화를 쏟아내기 바쁜 시기이니,
일본 내에서 천황 군국주의의 압력은 누구에게나 몰아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두번째 작품을 전시 홍보용 영화로 밀어붙일 이유는 없겠지만,
적어도 겉모양새에 있어서는 그러한 의심은 조금도 벗어날 수 없음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젊은 초짜 영화감독의 탄탄하지 않은 입지를 탓할 것인지
아니면, 전시 상황 아래 그 역시 군국주의의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인지 관계없이
이 땅의 후인이 보기에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이 담긴 영화는 아니올씨다.
더더군다나. 흥행에 성공했던 전작에서의 막 입문한 신인의 솜씨는 대폭 줄어들고
도저히 한가로이 즐기지 못할 늘어지는 서사 전개와 인물들 간의 억지 춘향씩 갈등은 씁쓸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그는 현재의 틀이라면 여성 동성 사회의 환타지 욕망이라고 살짝 비틀어 견주어봄직한 공간에서조차
천황의 흔적을 지우려하지않는 완고한 남성가부장의 울타리를 견고히 한다.
우선, 극의 주인공이자 역경 극복의 신화적 존재인 여성 반장의 일자리는
다른 여자 공장 노동자들과는 달리 남자들과 같이 한다.
그녀의 자리를 작업반의 맨 끝에 배치하여 도두라지게 하는 섬세함도 잊지 않지만,
거꾸로 보자면 일반 여성을 이끄는 여성만이 일반 남성과 같이 작업할 수 있다는 공식도 성립된다.
게다가, 극 중에서 어머니는 죽거나 부재하고, 아버지는 직접 등장하거나 목소리로 소식을 전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기숙사에는 대모격인 선생님이 있지만, 그녀는 주로 깊은 이해의 성격으로 부각되고,
한편으로는 그녀들에게 악기 합주를 가르치는 남성 선생의 자리도 배치된다.
전체 공장의 조정자는 시무라 다케시가 맡아 정신력=일본혼을 강조하는 방송을 행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자본의 양갈래길인 핫바디와 소프트바디도 아닌 모호한 국가인격체
즉, 인격의 완성이야말로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명제가 도처에 깔린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의 유일한 여성 주인공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여성 영화라 부를 수 없는 비속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여성의 신체를 한 국가체 완성이 매우 거슬린다.
당시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중요한 것이 정신의 단련이라는 데뷔작에서와 같은 모토라면
그것을 군수 물자 생산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단순 이식하는 것은 일본말로 무리다.
결정적으로, 감독의 작품 세계에 일관되게 노정되던 대결이라는 공식이 여기서는
국가를 위한 그녀들 자신의 희생과 최면이라는 섹스가 거세된 가스로 뿜어지는 것이 당황스럽다.
아무도 악하지 않고, 아무도 예쁘려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을 말하지 않는 세상은 전쟁 환타지에서 가능하다.
"가장 아름답게"는 패망이 가까워 오는 소리에 쫓기는 일본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부가시킨
군국주의의 우렁찬 마취의 목소리이자 전형적인 국책 홍보성 영화의 덫에 빠진 감독의 굴욕이다.
17. 속 스가타 산시로 續姿三四郞(1945) : 빈 술병에 유도 기술을 걸어 인격을 완성시켜라
이제 막 첫작품에 흥행성공한 신인은 제작사의 추가 압력을 받기 마련이다.
게다가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했고 국민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니,
일본 무술의 혼인 유도 영웅의 히어로 무비는 지속될 이유가 충분하다.
이제 다시 데뷔작의 신인 유도 고수는 혹독한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야한다.
이쯤이면 대강의 영화 제작의 구도는 완성되었으니, 어쨌든 뼈대를 완성해야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쉽게 흥행 속편의 공식에 스스로를 포장시키고만다.
첫 장면에서 그는 너무 쉽게 미군 해병과 돌아온 유도 영웅의 어이없는 한판을 올려
관객으로부터 가벼이 통쾌함을 주섬주섬 챙기려하더니
중반 이후에는 갑자기 잡스러운 무술들, 미국 권투, 일본 가라데들을 하위에 두고
일본 유도의 혼을 진정한 인격의 완성으로, 하나의 도 道로 자리매김하려는 성급함을 보인다.
오죽했으면 전편의 최후대항마였던 고수의 형제들을 불러들이기까지 하는 허방을 범할까싶다.
이 점에서 1인 2역을 해내는 악당 역할의 배우 연기는 그나마 이 덫을 살짝 피해주는 강인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극은 여기까지다.
여전히 유도 고수는 스승과 스님에게 생의 깨달음을 얻어야하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은 한없이 그의 부름을 기다려야하며
미국 권투선수와의 대결, 가라데와의 대결 등의 액션씬은 전편을 거꾸려뜨릴만큼 조잡하다.
전체적인 극 전개도 코믹함에 무게를 실었음에도 헐겁고 제대로의 중심이 없어 억지스럽다.
유일하게 이 속편을 살리는 것은 역시 군데군데 꿈틀거리는 장인 기질의 편집과 구도이다.
주인공이 수련 도장에서 규정을 어기며 술을 마실 때
모른 척 다가온
스승이 빈 술병에 유도 기술을 거는 장면과 주인공의 표정을 교차 편집한 일련의 시퀀스는
전체적으로 기울어버린 어두운 극에 하나의 빛을 던져는데
위 장면사진에서처럼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가 즐겨 사용하는 촛불-두 사람- 술병의 삼각 구도가 태동할 정도로
도장에서의 스승-제자의 가르침과 각성의 구간은 공들인 흔적이 눈에 띄인다.
여기에 주인공의
어린 제자가 점점 더 성장해가는 연속 편집 등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성장을 엿볼 수 있다.
마치 당시 일본 국민의 상황, 그리고 어쩌면 구로사와 아키라 개인의 영화감독 초년병의 경우를 떠올릴
영화 내 주인공이 돈과 밥을 통해서 주변인들에게 인품의 감화를 기대하는 시퀀스들은
그 자체로 차라리 휴머니즘이 아닌 패전 이후의 경제 빈곤과 감독 자신의 영화제작사와의 위치가 연상된다.
"속 스가타 산시로"는 일본 유도 영웅의 부활을 통해 국민 사기의 충전을 기원하는 동시에
밑바닥 가난에 대해서 털고 일어서려는 국가적 신체를 발견하려는 감독 자신의 애국가이다.
18.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惡い奴ほどよく眠る(1960) : 전쟁 책임 세대와 완전히 단절하라 !
먼저 이 영화의 위치를 말하고 들어가야겠다.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과 "요짐보(1961)" 사이에 이 작품은 놓여있다.
다시 말하자면, 흥행 완결을 위한 두 작품 사이에 그는 난데없이 기업 드라마라는 현대물을 들고왔다.
정확히는
대개의 기업 드라마 장르가 구축하는 적대적 합병이나 기업 전쟁 등의 자본 스릴러는 아니지만,
결코 처단될 수 없는 기업은 복수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완전히 떨어뜨려놓고
"이키루-살다(1952)" 이후 다시 한번 극 중심에 공무원을 올려놓고 이번에는 부정부패를 거론한다.
즉, 기업 드라마라기보다 기업에 종속된 공무원 사내 암살극이 알맞겠지만,
이 작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부정에 담합하고 고위 공무원을 조종하는 자본의 상층부와
목소리조차 배제된 저 너머의 극상층 존재들을 복수의 대상에서조차 거론하지 않을 때
영화는 전래의 기업드라마 장르의 무시할 수 없는 부정의의 속성을 띄게 된다.
위에 거론한 미후네 토시로의 남성 마초적 매력이 물씬 제대로 구사된 두 편의 흥행작 사이에
양복을 입고 심지어는 안경을 끼며 수염마저 밀어버린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군 중에서
보기드문 절대적인 비극 완성이라는 수렁으로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게다가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한 작품 중에서 드물게 하나의 장렬함조차 찾을 길 없이
어이없이 시체조차 화면에 담기지 않고 사라진 채로 처리되는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한다.
그의 영화 속 죽음으로 이와 비견할만한 작품은 "주정뱅이 천사"와 "밑바닥" 정도일 것이다.
"거미집의 성"에서도 역시 죽음으로 종결처리되지만, 가르키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고 하겠다.
이건 거의 하나의 완전한 단절을 위한 감독의 철저한 안배이다.
영화의 속내는 일본 내 2차 제국주의
전쟁 책임 세대와
전쟁 이전에 태어났으나 전쟁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부여되지 않을 성장 세대 간의 불연속성의 염원에 있는데,
감독은 기어이 후반부 감금 장면에서 폐허의 콘크리트 대지를 통해서 그것을 공간화한다.
집과 사무실, 술집만을 오가던 작품이 갑자기 궁지에 몰린 듯한 서사의 시기에 오히려
버려진 공장들의 무덤 속으로 고위 공무원(시무라 다케시)를 남치하여 감금시킬 때
견고한 흥행 가도를 달리는 감독의 한박자 쉼표가 가지는 방점이 어디있는가 쉽게 구체화된다.
초반부 결혼식 장면에서의 이상한 케이크 배달로부터 충분히 스릴러적 요소를 밀고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감독은 기꺼이 관객과의 줄당기기가 아닌 정의의 복수극으로 바로 내려앉는다.
이건 단순히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급박히 내려온 상황 전개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힌트를 주듯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인 50대 후반의 류 치슈를 검사 우두머리로 등장시키고
스가타 산시로의 주인공
이후 종종 감독의 작품군에 모습을 보이는 후지타 스스무도 형사로 출연하는데
이들 사법제도의 신성함은 마치 극 내에서 보여지지 않는 거대한 권력층의 탄탄함과도 비견된다.
즉, 감독은 이들 익숙한 배우의 얼굴을 통해 일본 내의 보수적 희망에 여지를 두려한다.
한편으로 숨겨진 채 배치된 이와같은 가능성에의 설득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열려진 비극적 장치로서
가면에 가리워진 불의의 아버지를 둔 무능한 아들과 그에 의해 불구가 된 딸의 조합과
절름거리면서 복수의 도구와 사랑의 대상 사이에 스스로를 빠뜨린 주인공 미후네 토시로의 로맨스는
위 장면 사진에서처럼
커다랗고 긴 관을 상징하는 석조건축물 끝에 놓인 두 남녀의 재회처럼
불가능한 정의 추구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도식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처럼 기묘하게 작동한다.
게다가, 양념처럼 두 어번 등장하는 히치콕식 맥거핀인 약병의 존재는
결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선한 자들의 존재감을 이물감있게 추려내고,
하나의 결혼식과 하나의 장례식이라는 조합,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 들의 떠돌기라는 유령놀음은 극의 방만함을 틀어막는다.
제목과는 달리 영화 내에서는 나쁜 놈들이 더 잘 자지는 않지만, 더 오래산다.
그들에게는 윤리 대신에 축적만이 영구히 남겨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감독은 최고위층 공무원이 그의 아들과 딸이 그를 버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보다 더 윗선의 전화에 머리를 조아리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결단코 배제되어야할 전쟁 책임 세대와의 단절을 호소한다.
194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입구의 구로사와 아키라의 차이가 눈에 띄게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일본이라는 이름에 전체적인 책망을 내리는 것을 주저한다.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는 직선적인 복수 만가의 형식을 통해서
전쟁 이전과 이후의 절단을 호소하는 절름발이 시대의 우화이다.
(시사)
잘가라 이준석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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