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7 - 천국과 지옥//붉은 수염

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생 50년 전작 全作 30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전작 前作들을 변주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같은 말의 다른 판본이라는 유행어처럼 그는 스스로를 자기복제하지만,

여기서 유전자는 단순히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전진한다.  

 

신인 시절, 드러나게 "속 續" 이라는 명명을 한 "스가타 산시로"의 유도의 정신과 일본의 혼 부활로 출발해서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1945)"를 이어서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을 만들어

굳건히 지켜가야할 일본 천황제의 혼을 전후에 복구시키려 서민적인 코믹함을 더한 도망자의 길을 열었고,

 

"주정뱅이 천사(1948)"와 "조용한 결투(1949)"와 "붉은 수염(1965)"에서 연이어 인술을 펼치는 의사들을 등장시켜

의사 3부작이라 불러도 좋을  전후 일본 국가적 상처 치유를 휴머니즘이 가득 담긴 집도술로 의사 개인의 고독을 가렸으며,

 

"요짐보(1961)"와 "츠바키 산주로(1962)"로 이어지는 빈민 사무라이 활극 2부작은

미후네 토시로의 복색과 서부극과 고어물의 합성으로서의 무협물, 1인칭 해결사 시리즈를 통해 일본을 구원하려했고,

 

세익스피어의 맥베드와 리어왕을 번안한 2작품인 "거미집의 성(1957)", "란(1985)"에서

감독 자신의 창조자로서의 후반기 허망한 자리를 예감하거나 실현한 허무주의를 침공받는 성채를 통해 구현하였고,

 

전혀 상반된다고도 해도 좋을 두 시각 속에서 자신의 좌충우돌하는 속내를 언뜻 비쳐버린

"산 자의 기록(1955)" 과 "8월의 광시곡(1991)"을 통해 원폭의 상처 모듬기를 내외적으로 시도하였으며,

 

"멋진 일요일(1947)", "밑바닥(1957)", "도데스카덴(1970)"의 빈민들의 리얼리즘 3 작품에서는

실내외와 희망/절망을 움켜잡거나 뿌리치지못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일상을 리듬과 축제를 실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가장 아름답게(1944)"와 "붉은 수염(1965)"은 

갑자기 여성 수난극이라는 종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왔음에도 만나진다.

남성 국가에 충성하여 신체를 활성화시켜야하는 여성 공장 노동자의 용맹 정진과 동성애적 흐름은

개인으로서의 남성에 희생당한 여성들의 성과 죽음의 본능이라는 이름 하에서 상호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는 점에서, 그것을 각인하든 하지 않든 결코 다르지 않은 여성 수난극이다.    

또다른 측면에서 짚어가자면 "붉은 수염"은 "요짐보"와 "밑바닥" 등을  재가공하여 

좁은 단락 하나씩을 분절되게 구사했으니 초중기를 결집한 마지막 작품으로 적절하다.

 

 

아래 글에서 거론하려는 작품 "천국과 지옥(1963)"은 2006년도에 일독하고 이번에 전작 읽기의 통사를 위해 다시 만났다.

이 작품은 출연진들의 면면들과 장르성을 굳이 따진다면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의 후속격인 느낌이 강하다.

우선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에서의 미후네 토시로-카가와 교코가 중년 부부로 등장하여 아들까지 두고 있는데,

실제 그들이 공단이라는 기업 사원이었고, 공단 총재의 딸이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천국과 지옥"에서 주인공 부부는 죽거나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복귀한 부부의 미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나카다이 다쓰야는 미후네 토시로와의 세대 교체를 연상시킬 정도의

대등한 분량의 기민한 형사 반장 역할을 특유의 예리한 턱과 눈길로 주도하거니와

시무라 다케시, 후지타 스스무 등 이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에 주-조연 배우군단으로 출연했던 주력들이

이제 거의 단역으로 대사도 한두마디 외에는 부여받지 못한 채 등장하여 감독 배우군들의 잔치를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정작 "천국과 지옥"과 더불어 주목받아야 할 영화는 초창기 유일한 형사극인 "들개(1949)"일 것이다.

미후네 토시로가 맡았던 신인 형사는 이제 성장하여 그 자리에 나카다이 다스야가 민첩한 경력을 뽐내는데.

"들개"에서 그를 가르치던 시무라 다케시는 이번에는 사건 해결을 주도하지 않고 브리핑 실에서 앉아만 있다.

단순히 "들개"와의 형사극 장르라는 유사한 서사 전개의 방식말고도

극 전체는 우선 일본 내 사회의 빈곤이라는 문제를 드러내는 사회 드라마적 성격을 다시 반복하고,

"들개"에서 잃어버린 권총 찾기가 주된 방향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유괴된 아이라는 설정을 던진다.

여기에 찌는듯한 더위라는 제 3의 주인공은 여전히 극 내 모든 인물들을 부여잡는다.

그렇지만, 전술했듯이 두 영화는 단순한 혈연지간이 아니라 계통을 달리하여 발화한 두 군과도 같은 인상을 받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중기를 마감하는 두 장편(143분, 185분)을 간략하게 언급해본다.   

 

19. 천국과 지옥 天國と地獄(1963) : 폐쇄 공간에서 야외로 다시 닫힌 곳으로 이어지는 힘 !

 

직선의 형태로 덮히는 실내와 수평의 아쉬움으로 닫히는 면회장의 차단문  

영화는 내내 위에서 아래로 위기를 이기지못하고 쏟아지는 바위처럼 불안하거나

하부에서 상층으로의 승강이를 꿈꾸지 못하고 버려진 폐가마냥 드나드는 이를 찾지 못한다.

 

일방향으로 흘러 결코 물러서는 플래쉬백이나 속도 조절하는 풍경화를 용서치 않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남성적인 힘의 연출이 극히 도두라지는 작품인 "천국과 지옥"은

전술한 바와 같이 "들개"의 뒤를 잇는 형사물이자 사회 드라마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단순히 전작의 복사판이 아닌 더 참혹하면서 긴장감과 결단 사이를 오가는 무게감은

마치 주인공 미후네 토시로가 14년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것처럼 괄목상대할만큼 성장했다.

그가 주연을 맡았던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 강인한 수염의 중후함이 실내를 장악하는 미후네 토시로는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에서 살아나 참된 기업인이 된 과감한 사내의 모습을 유감없이 연기한다.

   

영화의 첫 시작은 여성용 구두를 만드는 회사 - "내쇼날 슈즈"에서 국가는 쉽게 떠올려진다 -의 중역들과

회사의 실권을 다투는 공장장인 주인공 미후네 토시로의 기업 철학을 홍보하는 시퀀스로 열린다.

가볍게 툭 던지듯, 전후 60년대를 이끄는 일본 내 자본주의의 건전성 방향을 슬쩍 설정하는 속내가 비친다.

하지만, 가만 보자니 이것으로 모자란다 싶은 영화는 본론인 유괴 사건의 뒤바뀐 소년의 자리를 통해

부르조아와 노동자 사이의 투쟁극이 아닌 휴머니즘으로 극중 소년들이 옷을 바꿔입듯 가장해버린다.

 

피터지는 계급투쟁이나 심도깊은 계급갈등이 아닌 단지 저 너머 어딘가에로 내버려진 계급의 주소에 머물러버린

영화 후반부를 덮어주는 요소는 형사극 장르로서의 서서히 조여가는 범죄의 재구성인데,

특이하게도 구로사와 아키라는 할리우드식 스릴러가 아닌 점층되는 드라마 기법을 무더위 속에 산입한다.

손에 땀을 쥐거나 시선만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이입이 아닌 쫓는 자들의 침착성에 무게를 더할 때

영화는 갑자기 "이키루"와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의 공무원-공단 직원의 올바른 자세를 제시하는 듯 하다.

   

그 와중에 한편으로는 "들개"에서 중점적으로 덧붙였던 빈민층의 근근한 삶의 땀내를

마약 중독자들의 거리로 들어와 죽은채로 풀린 눈동자로 대체시킨다.

"들개"나 "천국과 지옥"은 모두 돈을 위해서 살인을 하지만,

범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변명의 여지를 두기 위해서 장면을 분절해 거리두기를 보인다.

 

"천국과 지옥"에서 유괴범과 주인공 공장장이 우연으로 혹은 부름의 필연으로 만나고,

"들개"에서 강도살인범의 가난한 집과 지저분한 방을 형사들이 방문할 때

구로사와 아키라는 근원적인 빈곤의 사유를 손등의 흉터나 더러워진 흰바지 이미지로 휘발시켜버리지만,

영화 후반부 두 주인공들이 수갑으로 하나로 묶이거나, 유괴범의 광기를 공장장이 듣게함으로서

당시 일본에서 누구에게 주의해야할 것인가를 관객에게 묻는다.

 

구두 제작 기업의 공장장인 사내는 타 중역 임원들과의 주식 경쟁에서 축출되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주식을 매입하려는 찰나에 서 있다.

동일한 시간대, 용의주도한 유괴범은 공장장의 아들을 납치했다고 믿었지만

그가 납치한 소년은 공장장의 운전 기사의 아들이었다. (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이 겹쳐진다.)

유괴범이 요구하는 금액은 공장장이 주식매입대금으로 마련한 돈과 비슷한 액수이다.

지금, 주식을 매입하지 않으면 자신은 기업에서 퇴출당한다 하지만, 소년은 죽는다.

반대로 소년을 살리려면 자신은 임원진에서 쫓겨나 거리로 나서게된다.

 

 

극 외적으로는 형사 혹은 공장장 대 유괴범의 구도이긴 하지만,

극 내부의 공장장 자신의 내적 갈등의 대결 구도가 오히려 더 팽팽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미후네 토시로에게 공장장의 역할을 맡겼을 때 신임한 지점은

그의 남성미에서 풍겨나오는 책임감과 해결이라는 기존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제 본격적인 사건 해결의 두뇌 싸움은 서서히 1인자로 오르는 나카다이 다스야가 담당하도록 한다.

이른바, 관념으로서의 계급 고민과 실천으로서의 업무 진행의 분리법.

두 인물에게 각각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과 동시에 극은 철저히 내부와 외부, 전반과 후반으로 나뉜다.

 

 

아랫동네의 유괴범 시선으로부터 감시받아 감히 커텐을 열지 못하는 홀로 선 부르조아 저택은 갑자기 애처롭고

더 이상의 햇빛을 갈구할 수 없을 상황으로 몰아진 퇴출과 유괴의 어두운 그림자가 겹쳐진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심리적 폐쇄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커텐과 인물들의 옷의 직선을 활용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는 혹은 창살처럼 사방을 포위하는듯한 커텐의 직선은

위 사진에서처럼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무리하게 연출하는 기법에서도 확연히 자기 몫을 차지한다.

 

 

이 직선 이미지는 그대로 기차라는 밀폐된 이동 공간으로 이어지는데,

유괴범이 요구한 돈가방을 직선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넓은 야외로 던지는 교차 설정은

이후 실내에서 점차로 빠져나와 거리와 유흥가, 마약촌 급기야는 바다로까지 넓어지는데

관객의 입장에서는 전반부의 숨막히는 실내에서 점차로 실외의 트여진 시야를 확보하는 쾌감을 가지지만,

그 시선이 마약촌과 빈민굴을 거칠 때 급속히 움추려든다.

감독은 직선 이미지를 종결시키는 공간으로 후지산과 바다를 소년의 그림과 실제 풍경으로 제시함으로서

당시 일본의 실내외를 모두 포박하려는 담대하지만 모호한 의중을 드러낸다.  

 

공장장의 결단은 결코 쉽게 내려지지 않고, 부인과 운전기사로부터의 간곡한 통곡을 통해서

일면 우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점은 가벼운 휴머니티를 경계하려는 감독의 의도겠지만,

그 과정에서 미후네 토시로의 굵은 수염으로 이미지화되는 내면의 선들은 어느때보다 강렬하다.

 

 

이와 같은 주인공 공장장의 선율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잇는 기차 시퀀스로 종결되면

이후 그는 쓸쓸한 말년을 예감하는 어깨 처진 사내로 물러난다.

극중 다수가 환호하는 여론에 의한 영웅화 역시 그의 입으로는 결코 내뱉어지지 않는다.

순순히 자신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게 최종장을 구성하는 자세는

"이키루"에서 위암 말기를 앞두고 마지막 업무를 실행하려는 시민과장 등을 떠올리게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대중의 환호가 아닌 스스로의 중심 혼을 지키는 사내들에게 마초적 환상을 뒤집어씌운다.

 

 

극 초반 지속되던 굵은 선이 중반 거리, 후지산과 바다를 만나서 교차되었다가

마지막 시퀀스인 유괴범과 공장장의 면회장 만남을 통해서 공간화된다.

유괴범은 자신의 빈곤한 현실을 말하며 울부짖는데,

의사 인턴이라는 또다른 신분을 생각한다면 극적으로 적절하지는 않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속 의사 역할로는 거의 유일하게 비치유적이며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다.

 

 

면회가 아닌 끝맺지못한 고해성사가 될 뻔한 만남이 종결되면

서서히 작동하는 위 장면 사전에서 보이는 차단막의 가로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운동과 가로선분의 교차를 통해서 

작품 전체가 추구하는 상하좌우의 봉합, 계급을 위로하는 휴머니즘의 해법을 좌표화시킨다.

 

 

"천국과 지옥"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계급의 허실을 공격하려다가

성큼성큼 진하게 뒤로 물러서서 유괴된 인간의 이름으로 평정되버린 카네이션 한송이다.  

   

 

 

20. 붉은 수염 赤ひげ(1965) :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여성 수난극이 우물의 물 한 방울로 떨어지네.

 

스승과 제자라는 전통적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얼개 안으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신의 선배 미조구치 겐지가 일구어온 여성 수난극을 끌어들인다.

성(삶)적 본능과 죽음에의 본능을 휘몰고 들어온 셋 혹은 네 여인의 이야기는 자못 인상적이고

오히려 서사의 초반 일본판 동의보감을 예상했던 관객들에게 감당치 못할 당황을 안긴다.

( 심지어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보기 드문 여성 목소리의 회상과 나레이션조차 등장한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성과 죽음으로 가득한 여성 수난극이라니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다.

 

 

더 나아가, 감독은 영주를 찾아가 진료비를 받는 자리에서 이제 흰 백발이 된 시무라 다케시의 조연 역할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 어떻게 다른가?"라고 붉은 수염 미후네 토시로에게 질문하고 정확한 대답을 회피하게 함으로서

이 작품 전반에 대한 주제 구성을 명확히 한다.

결국 남자들이 죽거나 다친 자리 뒤에 가난한 도둑 소년은 살아남아서 후일 "도데스카덴(1970)"을 기약한다.

죽음도 삶이 다르지 않다라는 단정에 프로이트적 진단서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담담하고 처연한 눈길로 답할 뿐이다.

 

 

영화 내에서 유년 시절 학대에 의한 외상을 겪은 여인들에 대한 남성 의사의 치료는

그 자체로 분명 구로사와 아키라의 단출한 휴머니즘이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여성공동체의 기억인 "가장 아름답게(1944)"를 소환하여 치유의 주문을 외우고

그들 모두의 자궁 안으로 눈물-난자 한 방울을 흘려 소년을 회생시킨다.

이에 반해 유년 시절 성폭행의 외상을 남성 살인이라는 왜상 歪像으로 변형시킨 여인은

스스로 정상성을 회복하면서 자살 기도를 하고 이를 통해 방치된 아버지의 자리를 꾸짖는다.

 

 

이 모든 설정의 굳건한 뒷자리에는 붉은 수염이 절대선의 가치로 아버지로서 물리칠 수 없는 존재론으로 배치된다.

심지어 그는 '요짐보"의 악당 학살과 "스가타 산시로"의 유도 기술을 결합시킨 듯한 액션 시퀀스를 완성하고

"주정뱅이 천사"와 "조용한 결투"에서 전후 일본을 치유하려던 인술을 이제 에도 시대의 봉건기로 되돌려

일본 역사 내의 유구한 하나의 강건한 혼으로 승화시키려는 야심까지 보인다.

비대해진 영주에게 뚱뚱해서 생긴 질병이라고 조롱할 수 있을 때 진정 수염은 '붉을' 필요가 있다.

주인공 미후네 토시로가 마치 오래전 시무라 다케시를 비롯한 일본 영화의 어른들이 버릇처럼 보였던

머리 쓰다듬기 대신 흑백 영화에서 구별이 불가능한 '붉은' 수염을 반복해서 만질 때

그는 기존의 모든 일본 영화들 속의 존경할만한 어르신들에 대한 집약된 표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자리는 결국 스승-제자라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오랜 가르침의 공식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이라는 휴머니즘의 자장 안에서 작동되므로

전반부 여성 수난극의 독특함이 그친 자리에 후반부 반복되는 감독의 테제들은 

마치 제자 역할의 배우(그는 "츠바키 산주로"에서도 가르침을 받는 젊은 사무라이였다)가 

드디어 평복에서 의사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기어이 다시 노정된다.

그 종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오즈 야스지로가 그토록 염원했던 "결혼-약혼"이라는 의식을 소환하여

일본 내부의 전통적인 복원이라는 전쟁 전 세대의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아들의 아버지 역할로 "꽁치의 맛" 이후의 류 치슈가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첫번째 여성의 사연은 흡사 "원초적 본능"을 그대로 사극 속으로 옮겨온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에로틱 스릴러의 정서를 다다미 방의 명암 구조만을 이용해서 되살린다.

결핍된 남근 대신에 머리의 비녀를 남근화시켜 살인도구로 화한 여성의 살인신화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야말로 성(삶)은 곧 죽음과 다르지 않는 프로이트적 선언을 육체를 다다미방에 밀착시키고 돌파한다. 

하지만, 으례 그렇듯 여자의 결핍과 충족은 항시 또다른 결여 앞에서 좌절되어야하는 법이니

극 중 최강 아버지의 인도적인 법으로 군림하는 주인공 붉은 수염에 의해서 위기에 처한 남성은 구출된다.

그것은 단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미후네 토시로의 건장한 체구만으로도 충분함을 감독은 영리하게 파악한다.

 

 

두번째 여성의 어머니와 자신의 남편이 간통하는 일생을 참아낸 여성의 사연은

그것을 가만히 정신과 상담의처럼 들어주는 붉은 수염의 청취 치료 앞에서 광기처럼 빛난다.

여성은 세 명의 자식을 기구한 도피의 변명으로 내세우지만,

자신이 염원했어야할 어머니의 결핍, 아버지라는 부재 속에서

유아기때 이미 팔루스의 자기대상을 잃어버린 존재의 무성성을 결국 살인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더욱 자극적이다.

그녀 역시 새로운 아버지인 붉은 수염의 몇 마디 말의 법으로서 극악한 사연과는 별개로 간단히 정돈된다.  

 

 

세번째 여성의 두 남편을 둔 아내의 자살은 단순한 사람 간의 애정과 죽음을 뛰어넘어

여기에 일본에서 흔히 발생한 대지진으로의 이별과 죽음 직전의 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연-합일의 인연과 존재론을 설파하면서 로맨스 극의 정점을 살린다. 

여성의 과거 회상과 내레이션 목소리라는 특이점 외에도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을 부각시키지만

결국 극히 유교적인 처리인 자결이라는 방식을 대지진으로 덮어버림으로서 여성 주체를 희석시킨다. 

 

 

위 여성들의 죽음에는 그와 같이하는 아버지 혹은 남편이라는 자리에 놓인 남성들의 죽음이 같이 배치되는데

그들의 회한에 가득찬 예술적 인고와 봉사 정신은 스스로보다 여성들의 사연을 감내하고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들과 차별성이 보인다.    

 

네번째 여성은 12살 소녀이다.

영주를 찾아가 상층 계급을 조롱한 다음 찾아간 성매매촌에서 붉은 수염은 소녀의 학대를 보고 그를 구한다.

두번째 여성의 사연에서 어머니가 성적인 경쟁 대상이었다면 이번에는 유사 어머니는 폭력과 가학을 일삼는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꾸준히 얄미운 중년 여성 역할로 기용되었던 배우가 유사한 배역을 맡아 연기한다.

한바탕 "요짐보"식의 예상치못한 활극이 극 내부의 불균질함을 무릅쓰고 펼쳐진 이후

영화는 드디어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원위치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제자격인 젊은 의사는 드디어 자신의 첫 환자로 12살 소녀의 학대받은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고

이후에는 오히려 그 소녀에게 간호를 받음으로서 스스로를 회복하는 과정을 거쳐 완전해진다.

거의 본론격이라 해도 좋을 차분히 제어된 가장 조용한 위 시퀀스가 끝나면

영화는 이제 "밑바닥"과 "도데스카덴"의 분위기를 전하는 종결 에피소드의 공동체로 몰입한다.

밥도둑 소년과 치유된 소녀간의 우정은 극 내부에서 퍼져나가 내부 관객을 만들고 스크린 너머로 울린다.

극빈층인 소년이 독약을 먹고 생사기로에 놓일 때 위 장면 사진에서처럼

여성들이 우물 속으로 소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그녀들의 자궁 언어를 수축시킴으로서

아버지의 인술과 더불어 소년을 되살릴 때 그동안 극 내부의 죽음들은 이제 새로운 탄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탄생의 의식, 결혼-약혼이라는 화사함뿐이다. 

 

   

 

"붉은 수염"은 미조구치 겐지의 여성과 구로사와 아키라의 스승 활극, 오즈 야스지로의 약혼식으로 구성된

전쟁 전 세대 선배감독들에 대한 경의이자 자신의 초-중기를 정리하려는 감독 자신의 위기 징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