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스턴 테오 엡스타인 단장은 트레이드 마감시한 동안 노마 가르시아파라 트레이드에 머리를 싸맸다(가르시아파라는 결국 컵스로 보내졌다). 그 외 전력 보완은 다른 직원들에게 맡겼는데 당시 인턴이었던 잭 스캇은 대주자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선수 한 명을 추천했다(스캇은 현재 연구개발 부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엡스타인은 스캇의 의견을 받아들여 트레이드를 통해 그 선수를 데려왔다(mlb.com)
당시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이 영입은 보스턴 역사를 바꿨다. 그는 10월18일 경기에서 9회말 대주자로 등장. 2루 베이스를 훔친 데 이어 동점 득점까지 올렸다. 모두가 눈치챘을 이 대주자는 '더 스틸' 데이브 로버츠였다. 로버츠의 득점으로 분위기를 가져온 보스턴은, 마리아노 리베라가 무너진 양키스를 리버스 스윕으로 격침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를 가볍게 누르고 86년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풀었다.
대주자(pinch runner)는 말그대로 루상에 나가있는 선수를 대신하는 주자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주자보다 발이 빠르고 베이스런닝에 능한 선수가 기용된다. 혹은 타자가 부상을 당해 주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출장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목적은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주자가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코티시 러너(courtesy runner)다. 초창기 야구는 타자 뒤에서 지켜보다가 타구가 나오면 뛰는 역할만 하는 선수가 있었다. 선수층이 얇다보니 부상 방지 차원에서 허용된 일이었다(체력부담이 큰 투수나 포수가 특히 그랬다). 코티시 러너의 활용법은 규칙이 제정되면서 달라졌다. 인플레이 중 경기에 개입할 수 없게 됐고(1878년) 이 또한 상대팀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1882년). 오늘날의 대주자와 가장 다른 점은 자유롭게 재등장이 가능했던 것. 대주자가 계속 경기에 남기 위해서는 라인업에 누군가와 교체하고 수비를 맡아야 했지만, 코티시 러너는 필요할 시 또 나올 수 있었다. 이에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해 1950년부터는 전면 금지되었다.
대주자의 필수 덕목은 빠른 발이다. 여느 노래 제목처럼 치고 달릴 것 없이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됐다. 그렇다면 단순히 발만 빠른 선수는 최고의 대주자가 될 수 있을까. 실제로 메이저리그에는 이런 생각을 했던 구단주가 있었다.
발명은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이 말에 따르면 오클랜드 구단주 찰스 오스카 핀리는 발명가였다.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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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리는 로스터 한 자리를 팀에서 가장 빠른 선수를 위해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이전까지 없었던 '지명 대주자(designated runner)'라는 역할을 만들었다(핀리는 지명타자제도 도입도 강력히 주장했다).
핀리의 첫 작품은 앨런 루이스였다(베이스볼 다이너스티). 파나마 출신 루이스는 타격이 형편 없었다. 믿는 구석이라곤 오직 두 발 뿐으로 타고난 스피드 덕에 '파나마 특급(panamanian express)'이라고 불렸다. 문제는 루이스가 발만 빨랐다는 것. 오클랜드 감독을 맡았던 딕 윌리엄스는 "나는 그가 자기 글러브나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핀잔을 줬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루이스가 야구의 기본 규칙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루는 뜬공을 친 루이스가 아웃된 사실도 모르고 3루까지 내달렸다. 3루코치가 "돌아가라"고 소리친 뒤에야 머쓱하게 물러났는데 돌아가는 방향조차도 마운드를 가로질러서 갔다(이는 불문율에 어긋난다). 루이스는 1973년 35경기에 나서는 동안 단 한 번도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9월25일 미네소타전을 제외하면 대주자 교체 후 수비를 본 적도 없다. 홈플레이트를 밟은 것은 16번. 도루는 7개를 기록했는데 성공률이 그리 높진 않았다(4실패).
루이스의 실패를 본 핀리는, 그러나 굴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을 했다. 이제는 한 술 더 떠 프로무대에서 야구 경력이 전무한 선수를 데려왔다. 단거리 주자 허브 워싱턴이었다. 워싱턴은 미시건대학에서 육상 스타로 각광받았다. 50야드(46m) 대시와 60야드(55m) 대시에서 최고기록을 보유할만큼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특히 홈에서 2루까지 거리이기도 한 60야드 대시에서는 5.9초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남겼다(메이저리그 평균은 6.9~7.0초).
핀리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가진 워싱턴이 루이스의 실패를 지워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이 역시 헛된 꿈이었다. 야구는 특출난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워싱턴보다 다른 종목에서 더 빛을 발휘했던 선수도 야구를 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부지기수다. 1974-75년 도합 105경기에 출장한 워싱턴은 단 한 번도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통산 31타석에서 6안타(1홈런)를 친 루이스와 달리 철저하게 대주자로만 기용이 됐다(이에 오클랜드 포수 레이 포시는 방망이를 어깨에 가져다대고 사진을 찍은 워싱턴을 비웃었다).
핀리가 대놓고 밀어준 1974년. 워싱턴은 92경기에 나서 29득점, 29도루를 기록했다. 6월23일 캔자스시티전에서는 끝내기 득점도 올렸다. 그러나 워싱턴의 스피드는 경기에서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다. 29도루를 하는 대가로 16개의 아웃카운트를 헌납해야 했으며(성공률 64.4%) 끝내기 득점도 발로 만든 점수가 아니었다(밀어내기 볼넷). 애초에 야구 이해도가 떨어지는 선수에게 많은 것을 바란 것이 화근이었다. 오클랜드 중심타자 레지 잭슨은 워싱턴에 대해 "뛰어난 육상 선수는 맞지만, 야구선수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야심차게 워싱턴과 계약한 핀리는 "나는 그에게 최소 10경기는 승리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워싱턴의 통산 승리기여도는 -0.4에 그쳤다(1974년 -0.4/1975년 0.0).
단일시즌 무타석 최고득점
1. 허브 워싱턴 (1974) : 29득점
2. 앨런 루이스 (1973) : 16득점
3. 알베르토 로이스(1979) : 6득점
4. 에디 필립스 (1953) : 4득점
4. 허브 워싱턴 (1975) : 4득점
4. 릭 웨이츠 (1976) : 4득점
흥미로운 것은 오클랜드가 이들을 데리고 있었던 1973-74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오클랜드는 1972-74년 월드시리즈 우승, 1971-75년에는 5년 연속 지구를 제패했다). 플레이 하나가 승부를 좌우하는 단기전에서는, 대주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루이스와 워싱턴은 이마저도 해내지 못했다. 루이스는 1972년 월드시리즈 1,2차전에서 두 차례 도루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루이스를 잡아낸 신시내티 포수는 자니 벤치였다). 워싱턴도 1974년 챔피언십시리즈 2,3차전에서 두 차례 도루 시도를 성공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설상가상 그 해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는 팀이 한 점차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대주자로 나와 견제사를 당했다. 팀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할 대주자가 되려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워싱턴을 견제사 시킨 투수는 그 해 사이영상 마이크 마셜이었다).
이처럼 오클랜드는 대주자를 적극적으로, 또 전문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팀이었다. 이후 돈 홉킨스(1975-76) 맷 알렉산더(1973-81) 로드니 맥크레이(1990-92) 루이스 유제토(2002-03) 등이 대주자 계보를 이어왔던 선수들(이들은 <레퍼런스> 포지션란에 대주자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럼 현재 가장 현명하게 대주자를 쓴 팀은 어디일까.
2014-15년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룬 캔자스시티는 단기전에 특화된 팀이었다. 필요한 점수를 마련한 다음에는 강력한 수비, 더 강력한 불펜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다 보니 경기 후반에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흐름을 바꿔 준 대주자 덕분이었다.
제로드 다이슨(32)은 자타공인 최고의 대주자 요원. 2010년 데뷔 후 정규시즌 대주자로 출장한 87경기에서 42도루(11실패) 31득점을 올리는 생산력을 발휘했다. 다이슨의 존재는 큰 무대에서 더 두드러졌다. 2014년 캔자스시티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9회말 극적인 동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대주자로 나온 다이슨의 공이 컸다(희생번트 2루→3루 도루→희생플라이 득점). 2015년 포스트시즌에서도 모두가 대주자로 나와 내야진을 뒤흔든 다이슨에 집중했다. 빠른 발로 상대 배터리를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빼어난 수비로 공수에서 큰 보탬이 됐다(통산 외야수 런세이브 +60).
2010년 이후 대주자 출장 순위
1. 제로드 다이슨 : 87경기
2. 브렌트 릴리브릿지 : 64경기
3. 에두아르도 누네스 : 52경기
4. 앤드류 로마인 : 51경기
4. 숀 로드리게스 : 51경기
6. 라제이 데이비스 : 47경기
6. 돈 켈리 : 47경기
2010년 이후 스피드스코어
1. 다이슨 : 9.2
2. 에릭영 : 8.5
3. 해밀턴 : 8.1
4. 디고든 : 8.0
5. 젠트리 : 7.9
6. 라제이 : 7.8
캔자스시티는 다이슨의 뒤를 이을 선수도 나타났다. 다이슨과 체격도 비슷한 테런스 고어(25)다. 역시 포스트시즌에서 대주자로서의 역량을 드러낸 고어는 다이슨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한 선수. 다이슨과 고어는 과거 시행착오를 겪은 찰스 핀리가 기대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캔자스시티는 또 한 명의 야생마 라울 몬데시 주니어(21)도 지난해 데뷔했는데(9도루/1실패) 그러자 다이슨을 시애틀 선발 네이트 칸스와 트레이드 했다.
안타보다 도루가 더 많은 선수 (통산 15도루)
1. 앨런 루이스 (44도루/6안타)
2. 허브 워싱턴 (31도루/0안타)
3. 돈 홉킨스 (21도루/1안타)
4. 테런스 고어 (19도루/0안타)
대주자는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아무런 고민 없이 무작정 뛰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대놓고 보여주는 행동이다. 핀리의 희생(?)으로 모두가 이 사실을 잘 알게 됐으며, 그로 인해 대주자들의 수준은 이전보다 높아졌다. 타석이 아닌 루상에서 상대 배터리와 정면승부를 펼쳐야 하는 포지션. 대주자에 대한 인식은 달라져야 한다.
네이버보다가 재미있는 글이라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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