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은 재미없다.
유머를 던졌음에도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고 한없이 재미가 없다.
축구선수를 부업으로 하고 있는 개그맨 토마스 뮐러나 경기 도중에 심판한테 달려들다가 햄스트링이 올라온 위르겐 클롭 정도의 순수광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재미없다고 우리는 농담을 한다.
그런데 이런 독일식 유머가 레이스 트랙 위에 등장한 적이 있다.
1970년대 포르쉐는 사진 속 차량인 917을 제작해서 당시의 스포츠카 시리즈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그 이전까지는 포드, 페라리, 재규어, 애스턴마틴 등 많은 경쟁자들이 르망에 있었으나 포르쉐가 917을 들고 나온 시점부터 포르쉐가 르망의 패왕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1969년에 처음으로 르망에 달려들었던 917이고, 1년 뒤인 1970년에 포르쉐의 사상 첫 르망 우승을 안겨주게 된다.
포르쉐는 70년대에만 5번의 르망 우승을 차지하고 이 중 첫 2번이 917의 작품이다.
917 모델은 굉장히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이 중 2가지의 바리에이션을 알아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기에 한 번 소개를 해보겠다.
포르쉐가 우승하고 싶었던 르망, 몬짜, 스파 등은 모두 최고속력이 매우 높고 평균속도도 높은 고속 코스다.
프랑스의 르망은 이 당시에 3km가 넘는 직선주로인 뮐산느 스트레이트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안전의 문제 때문에 이 긴 직선의 중간에 시케인을 설치해서 속력을 한번 떨구지만 그렇게 해도 330km/h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긴 직선주로다.
이탈리아의 몬짜는 지금 F1에서도 가장 평균속도가 높은 코스 중 하나로 속도의 성전이라는 별명까지 있다.
이 당시에는 마치 나스카처럼 옆으로 기울어진 오벌 코스까지 있었기 때문에 최고속력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벨기에에 위치한 서킷 드 스파 프랑코샹의 당시 레이아웃인데, 역시나 가속 구간이 굉장히 길다.
이러한 서킷들의 특성 때문에 엔진의 출력, 공기역학적으로 고속에서도 드래그를 적게 발생시키는 유선형의 차체가 중요시되는 컨셉이었다.
위 사진은 917의 초기 버전이다.
차가 굉장히 낮고 극단적인 유선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엔진의 출력을 위해 16기통 엔진을 장착하는 실험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에는 큰 맹점이 있는데, 바로 극도로 떨어지는 조종성이다.
상술한 요소들은 직선주로에서의 최고속력과 가속력 향상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고, 이러한 요소는 자연스럽게 제동성능, 코너링 성능을 떨어트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70년에 나온 차가 우리가 알아야 할 첫 번째 바리에이션인 917K다.
뒤에 붙은 K는 Kurzheck의 머릿글자인데, 이는 영어로는 Short-tail로 짧은 꼬리를 뜻한다.
이 917k는 917의 3번째 바리에이션이다.
이전까지의 917들은 무조건 유선형의 라인을 짜서 최대한 드래그를 줄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 917K는 컨셉을 바꿨는데,
휠베이스를 줄이고, 차체의 라인을 일부 수정해서 다운포스를 발생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뒤에는 가변형 스포일러까지 장착해서 코너링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이 917K가 또 한 번의 개량을 거쳐서 르망을 제패했는데,
대표적으로는 뒤쪽 좌우에 상어의 등지느러미처럼 핀이 달려있다.
저 핀의 역할은 차의 뒤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을 일부러 갈라 공기의 방향을 바꿔서 발생하는 난류를 억제하고 공기역학적 성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917K의 궁극적인 컨셉은
"컴팩트한 차체를 통한 코너링 성능"에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꼬리가 짧은 917이 있다면 꼬리가 긴 917도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위의 차량인 917LH다.
LH는 Lang-Heck의 머리글자로 영어로는 Long-Tail이다.
917K는 꼬리가 짧아 코너링 성능이 매우 좋았으나 차량의 길이 자체가 짧았기 때문에 직선주로에서의 안정성이 매우 떨어졌다.
그를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 게 917LH다.
전반적으로 유려한 유선형 차체에 리어 오버행을 길고 부드럽게 잡음으로써 차량 뒤쪽에서 발생하는 난류를 억제했다.
917LH는 917K와 함께 1970년부터 르망에 출동해서 달렸었다.
이 둘은 어떤 걸 개량했다기보단 서로 다른 컨셉의 차량을 같이 투입해서 데이터를 얻어내는 가치도 있었던 것이다.
1971년에는 프론트 디자인을 다시 설계하고, 뒷바퀴를 일부 가리게 설계를 해서 회전하는 바퀴에 의해 발생하는 공기저항을 줄였다.
그래서 1970년 버전보다 더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었으며, 뮐산느 스트레이트에서 397km/h를 찍기도 했다.
이렇게 917LH는 1970년에는 2위를 차지했으나, 1971년에는 3대 모두 리타이어를 했다.
이렇게 롱테일과 숏테일 버전 모두 유의미한 성과를 거둔 포르쉐는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바로 롱테일의 고속구간에서의 성능과 숏테일의 코너링 성능을 모두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 속에서 탄생한 차가 바로 사진 속 917/20이다.
이런 디자인을 짜낸 건 포르쉐 단독의 작품이 아니라 프랑스의 R&D 전문기업 SERA의 디자인 부서와 합작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일단 이전 917들에 비해서 훨씬 뭉툭하고 둔탁해 보인다.
앞부분을 더 짧게 만들었고, 앞쪽에 직사각형의 흡기구가 설치됐다.
그리고 차체가 좌우로 훨씬 넓어지면서 휠은 차체 안으로 조금 들어가게 되었고, 바퀴가 회전함으로써 발생하는 부정적인 공기역학적 효과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917LH의 요소가 잘 안 보인다.
꼬리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니고, 뒷바퀴를 가리지도 않았고 말이다.
사실 두 버전의 장점을 합치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에 어떤 차를 닮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긴 하다.
궁극적으로는 공기역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디자인을 찾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에 917K와도 917LH와도 그닥 안 닮은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사실 맨 처음에 컨셉 디자인은 사진처럼 제작되었다.
이는 917/20 스터디 모델이라고 불리는 버전인데, 극단적으로 바퀴를 가린 걸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진짜로 SERA의 디자이너가 작은 모형을 만드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게 그 다음에 나온 또다른 스터디 모델이다.
첫번짜 스터디 모델보다는 훨씬 자동차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나온 게 이와 같은 디자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전 917들처럼 뭔가 날렵해보이는 디자인은 온데간데 사라졌고, 덩치가 커지고 둔탁한 디자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디자인은 포르쉐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었는데, 어떤 직원이 이 디자인을 보고 이렇게 흉을 봤다.
"ㅅㅂ 저게 차야 돼지야?"
이 비난은 포르쉐의 공돌이들의 귀에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그들도 디자인이 돼지를 닮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신박한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실제로 돼지의 부위와 그 경계선들을 실제로 차 위에 도장해서 진짜 돼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917/20은
핑크 피그
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렇게 뒤쪽에서 보면 독일어를 몰라도 알 만한 단어인 학센이라는 부위가 보일 것이다.
굉장히 유명한 독일의 음식인 슈바이네학센의 그 학센이 맞다.
그리로 돼지라는 굉장히 유명한 별명도 있지만 잘 안 알려진 별명도 있는데,
트뤼펠예거
, 바로
트러플 사냥꾼
이다.
과거 유럽에서 트러플을 채취하기 위해서 후각이 좋은 동물들을 끌고 가서 냄새로 찾게 했는데, 그때 돼지를 자주 썼다고 한다.
그리고 포르쉐의 공장이 슈투트가르트의 주펜하우젠에 있기 때문에 주펜하우젠의 돼지라고 칭하기도 했다.
결국 돼지다.
이렇게 개구리만 주구장창 만들던 독일놈들의 손에서 태어난 돼지는 5리터 수평대향 12기통에 터보를 얹어서 600마력을 냈고, 최고속력은 360km/h, 제로백은 3초로 끊어냈다.
이 돼지는 1971년 르망 24시에 출전했다.
917K, 917LH와 함께 모든 버전이 같이 르망을 달린 것이다.
퀄리파잉에서는 종합 7위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고, 본 레이스에서는 3위까지 올라가는 역주를 보였으나,
브레이크 트러블로 벽에 부딪히고 다시 움직일 일은 없게 됐다.
이 독일식 유머로 태어난 돼지는 포르쉐 측에서 회수해서 주펜하우젠으로 가져가 복원,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그렇게 돼지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2018년 다시 부활했다.
포르쉐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내구 레이스 시리즈인 WEC의 GTE 프로 클래스에 참가하는 911 RSR에 핑크 피그의 리버리로 등장을 시킨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푸른색 베이스의 911은 917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자 그를 뛰어넘는 괴물인 956과 962에 사용된 로스만 리버리다.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기념비적인 리버리를 바른 핑크 피그 911은 2018년 르망 24시의 GTE 프로 클래스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47년 전에 우승을 하지 못한 원조 핑크 피그의 한을 드디어 풀어준 순간이다.
이 독일산 돼지는 한국에 온 적도 있다.
2022년 포르쉐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포르쉐 이코넨 전시회를 개최했고,
그 타이틀을 장식한 게 바로 이 917/20 핑크 피그였다.
본인은 이 전시회를 직접 가봤는데, 돼지라는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덩치가 정말 크고 넓었다.
내가 포르쉐를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게 못생기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돼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더 빨라지고 싶었던 포르쉐의 순수한 욕망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둔탁한 디자인을 향한 비난을 독일식 유머로 받아쳤다.
그리고 그 돼지를 기념하기 위해 돼지 코스튬을 입은 개구리는 원조가 이루지 못한 완주, 우승의 꿈을 대신 이뤄내주며 포르쉐가 가진 모든 것들을 보여줬다.
언제나 서킷에서 더 빨라지는 것만을 생각해내는 마인드
르망의 패왕이라는 지위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유머까지.
이 독일식 유머는 어떤 거 같나?
사실 나도 별로 안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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